1930년대 중후반, 체코슬로바키아 브라티슬라바의 유대인 지역

제2차 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 중동부유럽의 유대인들은 ‘슈테틀(Shtetl)’이라 불리는 자신들의 마을에 모여 살며 전통적인 삶을 추구했다.

 

하지만 1933년, 나치가 정권을 잡으면서 시작된 ‘아리아나이제이션(Aryanization, 아리안화)’으로 독일 점령지의 유대인들이 사업체를 빼앗기고 거주지에서 쫓겨나면서 슈테틀은 해체되기 시작하였다.

 

– 관련 글: 1939년, 독일 점령지의 유대인 탄압

 

미국의 사진작가 로만 비슈니악(Roman Vishniac, 1897~1990)은 전쟁이 발발하기 전 중동부유럽에 거주하는 아슈케나지 유대인(Ashkenazi Jews)들의 삶과 문화를 사진으로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종전 후 그는 자신이 찍은 슈테틀의 사진들을 모아 ‘사라진 세계(A Vanished World, 1983)’라는 제목으로 출판했다.

 

아래는 1935년부터 1938년 사이, 비슈니악이 체코슬로바키아(현재 체코와 슬로바키아)의 브라티슬라바(Bratislava) 슈테틀을 촬영한 모습이다. 1
▲ 로만 비슈니악과 사진집 ‘A Vanished World’

 

아래는 1935년부터 1938년 사이, 비슈니악이 체코슬로바키아(현재 체코와 슬로바키아)의 브라티슬라바(Bratislava) 슈테틀을 촬영한 모습이다.

 

아래는 1935년부터 1938년 사이, 비슈니악이 체코슬로바키아(현재 체코와 슬로바키아)의 브라티슬라바(Bratislava) 슈테틀을 촬영한 모습이다. 3
▲ 유대인 지구(슈테틀)로 들어가는 계단.

 

로만 비슈니악은 러시아 파블롭스크 출생이었지만 유대계 조상을 가지고 있었고, 러시아 혁명으로 반유대주의가 확산되자 1918년 베를린으로 이주했다. 이후 독일에서도 반유대주의가 확산하자 미국유대인 공동구호위원회(JDC)로부터 중동부유럽의 유대인 지역사회를 촬영해줄 것을 의뢰받고 이 사진들을 찍게 되었다.

아래는 1935년부터 1938년 사이, 비슈니악이 체코슬로바키아(현재 체코와 슬로바키아)의 브라티슬라바(Bratislava) 슈테틀을 촬영한 모습이다. 5
▲ 유대인 지구의 골목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

 

아래는 1935년부터 1938년 사이, 비슈니악이 체코슬로바키아(현재 체코와 슬로바키아)의 브라티슬라바(Bratislava) 슈테틀을 촬영한 모습이다. 7
▲ 비슈니악은 직물 판매상으로 위장하여 사진을 촬영하였고 간첩으로 오인받아 경찰에 체포되는 일도 있었다.

 

로만 비슈니악은 52kg에 달하는 무거운 장비를 짊어지고 산악지역과 오지에 있는 가난한 유대인 마을을 카메라에 담았다. 로만 비슈니악의 사진은 오늘날 홀로코스트 문학과 예술작품에 영감을 주는 자료가 되고 있다.

아래는 1935년부터 1938년 사이, 비슈니악이 체코슬로바키아(현재 체코와 슬로바키아)의 브라티슬라바(Bratislava) 슈테틀을 촬영한 모습이다. 9
▲ 유대인 지구의 골목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과 계단을 내려오는 노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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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대인 지구의 다세대 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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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빨래 바구니를 들고 나오는 유대인 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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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대인 지구의 2층 건물에서 나오는 해맑은 어린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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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대인 지구의 골목을 나오는 젊은 유대인 여성. 체코슬로바키아에 유대인들이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11세기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타 지역과는 달리 브라티슬라바의 유대인들은 그들만의 전통적인 생활방식을 선호했고 언어적으로도 독일어를 사용하는 인구가 많았다.

아래는 1935년부터 1938년 사이, 비슈니악이 체코슬로바키아(현재 체코와 슬로바키아)의 브라티슬라바(Bratislava) 슈테틀을 촬영한 모습이다. 19
▲ 골목을 걸어 올라오다가 사진작가를 바라보는 유대인 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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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류상점을 나서는 유대인 남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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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리에서 심각한 대화를 나누는 유대인 노인들. 급변하는 유럽 정세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일까.

 

1939년 3월, 나치 독일의 괴뢰국가로 세워진 슬로바키아 공화국의 요제프 티소(Jozef Tiso, 1887~1947)대통령은 자국 내 유대인들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1941년 9월부터 유대인들은 부동산과 사치품을 소유할 수 없게 되었고, 공공장소에서는 ‘다윗의 별‘을 착용하는 것이 의무화되었다.

 

약 5,000명의 유대인들이 2차 대전 발발 직전에 다른 국가로 이민을 갔고 그 이후 수천 명이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했지만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강제수용소에서 사망했다. 1930년 인구조사에 따르면 체코슬로바키아의 유대교 인구는 357,000명이었다.

 

아래는 1935년부터 1938년 사이, 비슈니악이 체코슬로바키아(현재 체코와 슬로바키아)의 브라티슬라바(Bratislava) 슈테틀을 촬영한 모습이다. 25
▲ 아돌프 히틀러와 악수를 나누는 요제프 티소. 요제프 티소는 종전 후 미군에 의해 체포되었고, 가톨릭 신부 출신이었던 그는 성직복을 입고 교수형에 처해졌다.

 

아래는 1935년부터 1938년 사이, 비슈니악이 체코슬로바키아(현재 체코와 슬로바키아)의 브라티슬라바(Bratislava) 슈테틀을 촬영한 모습이다. 27
▲ 고철과 폐품을 수집하는 고물상과 우편물취급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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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다른 고물상 주인이 자신의 가게 앞에서 사진작가를 바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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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업실에서 활자를 배치하는 유대인 조판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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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러 개의 활자를 배치하여 주문받은 인쇄물을 구성하는 활판을 만드는 공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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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이먼 콘펠트(Simon Kornfeld)라는 이름의 자전거 수리점. 동명이인일 수도 있으나 체코 프라하 출신의 사이먼 콘펠트(1881~1943)라는 유대인 남성이 폴란드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 끌려갔다가 사망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만약 수리점의 사이먼 콘펠트도 유럽을 탈출하지 못했다면 홀로코스트의 희생양이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아래는 1935년부터 1938년 사이, 비슈니악이 체코슬로바키아(현재 체코와 슬로바키아)의 브라티슬라바(Bratislava) 슈테틀을 촬영한 모습이다. 37
▲ 다른 방향에서 본 사이먼 콘펠트 자전거 수리점.

 

전후 체코슬로바키아의 유대인들은 극히 일부인 2~3천 명 정도가 살아남았고 심신이 망가진채로 수용소에서 석방되어 고국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들의 비극은 끝나지 않았다. 독일어를 사용하는 유대인들은 국적이 ‘독일’로 분류되면서 체코슬로바키아 시민권과 보유했던 집에 대한 권리가 상실되었으며 의료혜택과 재정지원도 주어지지 않았다.

 

새롭게 체코슬로바키아 시민권을 신청하는 기간 동안 유대인들은 고국이라고 생각했던 체코슬로바키아 정부의 보호를 받지 못했으며, 이웃들로부터 비난과 배척을 받아야 했다. 이로 인해 전쟁에서 살아남고도 수많은 유대인들이 극단적인 선택을 하거나 쫓기듯 체코슬로바키아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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