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사 옛 터에 있던 경주 김씨 저택과 보성학교

지난번 포스팅에서 조계사 경내의 민영환 집터(조계사 민영환 집터에 얽힌 이야기)에 대해 다루었는데, 이곳에는 또 다른 가문의 역사도 있다.

 

바로 약 300여 년간 경주 김씨 가문이 터를 잡고 살아온 것인데, 그 마지막 후손이 대종교의 2대 교주였던 김교헌(金敎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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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교헌(金敎獻, 1868~1923)

 

경주 김씨 300년의 터


경주 김씨가 이 터에 자리한 것은 김교헌의 9대조이자 병자호란 당시 예조참의(禮曹叅議)로 인조를 따라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던 대신 중 한 명인 김남중(金南重, 1596~1663)으로부터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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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남한산성(2017)’의 인조(박해일)


그의 손자인 김주신(金柱臣, 1661~1721)대에 이르러서는 그의 둘째 딸이 숙종(肅宗)의 계비(인원왕후)가 되면서 왕의 장인이 사는 곳이 되었다.

 

이후 조선 500년간 가장 유명한 정치적 사건이라 할 수 있는 신임사화(辛壬士禍)가 발생하면서 김주신을 설득해 왕실 대비들 중 최고 서열이었던 인원왕후를 움직이려는 노론의 거두들이 밤이면 밤마다 이 터로 몰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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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BC 드라마 ‘동이(2010)’의 인원왕후(오연서)

 

김주신은 소론에 가까웠으나 연잉군(훗날 영조)을 지지하는 딸 인원왕후와 발을 맞추었다. 인원왕후가 연잉군을 세제책봉과 함께 양자로 입적하면서 왕을 외손으로 둔 경주 김씨 집안은 김주신의 아들들은 물론, 그 후손들 역시 음보(蔭補, 조상의 덕으로 벼슬을 얻는 것)나 추천으로 큰 벼슬자리에 오르면서 300년간 탄탄대로를 걷게 되었다.

 

훗날 영조도 자신을 세우는데 일조한 외조부의 공적을 잊지 않았고, 김주신의 제삿날이면 반드시 참석하였기에 저택에 세워진 사당의 마당에는 왕의 행차를 위해 박석(薄石)을 깔아 두었다고 한다.

 

하지만 조선이 국운을 다하면서 경주 김씨의 집 마당에도 찬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일제시대 교육의 장에서 오늘날 불교의 중심지로

 

20세기에 들어서며 대한제국 내장원경(內藏院卿)으로 있던 이용익(李容翊, 1854~1907)은 일본을 시찰하고 돌아와서 이곳을 새로운 교육의 장을 펼칠 터로 낙점하고 1905년, 보성전문학교(고려대학교의 전신)를 설립하였다.

 

개교 당시 한성아어학교(漢城俄語學校)의 건물을 사용하던 보성전문학교는 이듬해인 1906년, 같은 자리에 보성중학교를 설립하며 김교헌의 저택 일부를 매입하여 개조한 뒤 학교 건물로 사용하면서 경주 김씨의 시대가 끝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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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대 대학원 앞 이용익 흉상


이후 천도교에서 경영을 인수하면서 1914년에는 남아있던 기와집마저 허물고 2층 목재 교사를 새로 지으면서 ‘장안의 8대 가문’으로 불렸던 경주 김씨의 자취는 완전히 사라졌다.

 

보성전문학교가 낙원동으로 이전하면서 이 건물은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교무원, 조선불교청년회, 명성학원의 사무소가 연이어 들어섰고, 실천여학교(實踐女學校)가 개교하였다 폐교하는가 하면, 1930년에는 조선불교여자청년회의 발의로 설립된 명성여자실업학원(현재의 동국대학교 사범대학 부속여자고등학교)의 간판을 정문에 달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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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0년대 보성전문학교의 교사 모습. 정문에는 좌측부터 사립보성초등학교, 사립보성학교, 사립보성전문학교, 보성사(출판사)라는 간판이 걸려있다.


이런 이력으로 당시 이곳은 ‘학교와 인연이 많은 곳‘이라고 불리면서도 연이은 폐교와 이전으로 ‘학교의 흉당‘이라는 이야기도 오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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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거되는 중앙불교교무원(명성학원) 【동아일보 1937.08.04】


이후 1937년 11월에는 태고사 대웅전이 준공식을 가졌다.

 

이 건물은 전라북도 정읍에 있던 보천교(普天敎)의 본당인 십일전(十一殿)을 해체하여 이전한 것인데, 당시 건물 구입비용은 만원 정도였지만 경성까지의 수송비가 13,000원으로 배보다 배꼽이 더 컸다. 또한 경성역에서 공사장까지 목재를 운반한 화물차가 289대에 달하는 당시로서는 큰 공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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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고사(조계사) 대웅전의 1940년(좌)과 현재의 모습(우)


이후 태고사는 대한민국 건국을 거쳐 1955년 ‘조계사’로 이름을 변경하고 한국불교의 본산지로 자리매김하며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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