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귀족의 딸 ② 윤치오-윤고라 부부의 딸, 윤정선

윤치오(尹致旿, 1869~1950)는 일제로부터 작위나 공직을 받거나 은사금을 받은 기록이 없어서 친일인사로 분류되는 인물은 아니다. 하지만 아내 윤고라(尹高羅, 1891~1913)는 부친 김윤정(金潤晶)이 일제에 적극 협력한 친일파로 기록되어있다.

 

윤치오(尹致旿, 1869~1950)는 일제로부터 작위나 공직을 받거나 은사금을 받은 기록이 없어서 친일인사로 분류되는 인물은 아니다. 하지만 아내 윤고라(尹高羅, 1891~1913)는 부친 김윤정(金潤晶)이 일제에 적극 협력한 친일파로 기록되어있다. 1
▲ 윤치오, 윤고라(윤고려) 부부

 

일전의 포스팅에서 다룬 적이 있는데, 이들은 국내 최초로 공개구혼을 통해 결혼한 부부이기도 하다.

 

– 관련 글: 윤치오의 국내 최초 공개구혼 광고

 

둘 사이에는 딸 윤정선(尹晶善)이 유일한 자녀였다.

 

윤치오(尹致旿, 1869~1950)는 일제로부터 작위나 공직을 받거나 은사금을 받은 기록이 없어서 친일인사로 분류되는 인물은 아니다. 하지만 아내 윤고라(尹高羅, 1891~1913)는 부친 김윤정(金潤晶)이 일제에 적극 협력한 친일파로 기록되어있다. 3
▲ 윤정선(尹晶善, 1909~?)

 

– 윤고라 여사가 남긴 따님 윤정선 양
– 구니노미야 어전 독창자(久邇宮御前獨唱者)


한 떨기 장미와 같이 어여쁜 작은아씨는 구(舊) 한국 학무국장 윤치오 씨의 둘째 따님 윤정선 양입니다.

 

방년 17세의 영리한 아기씨로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니 특히 창가의 특장이 있어 작년 봄에 조선에 오시었던 구니노미야(久邇宮) 전하 앞에서 독창을 한 영광까지 입은 일이 있었습니다.

 

정선양의 생모는 일찍이 구미 각국까지 이름이 쟁쟁하던 당대의 미인이요, 현숙한 부인인 윤고라 여사의 유일한 소생이니 정선양은 불행히 어려서 사랑 많은 어머님을 여의었으나 어머님의 현숙과 아름다움을 온전히 배운 것입니다. 학교에 가면 학과대로 열심히 공부하고, 집에 오면 집안일을 꾸준히 도와주며, 그리고 틈틈이 돌아가신 어머님의 깨끗한 성격과 귀한 생애를 본받는 것입니다.

 

어려서 어머님을 여의었으니 아름다운 어머님의 얼굴조차 기억지 못하여, 남아있는 사진을 안고 사모하여 흩어져있는 필적을 모아 배우는 애달프고도 귀한 생애를 한답니다. 세태에 물들지 아니하고 인정이 깊으며 경박한 소녀를 배우지 아니하고, 스스로 아름다운 정선양의 전도에 행복과 광명이 많기를 빕니다.

【매일신보 1926.11.08】


위 기사에 따르면 윤정선은 1926년 17세로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京城女子高等普通學敎) 3학년에 재학 중이었으며, ‘노래(창가)를 잘 불렀다‘는 기록이 있다. 단순히 잘 부른 정도가 아니라 매우 특출 났는지 1925년 일본 황족이 경성을 방문했을 때 앞에서 독창을 했을 정도.

 

나이 3~4살 무렵에 별세한 모친 윤고라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어서 어머니의 사진과 필적을 모으는 것에 애착을 가지는 모습이 주변인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고 한다.

 

윤치오 가계도의 오류


온라인 위키백과는 윤고라의 딸 윤정선을 윤치오의 첫째 부인 이숙경의 둘째 딸로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윤정선은 1909년경에 출생했고, 이숙경은 1907년에 사망했기 때문에 이는 명백한 오류. 이숙경의 사망일자는 황성신문의 부고란을 통해 1907년 1월 26일로 남아있다.

 

윤치오(尹致旿, 1869~1950)는 일제로부터 작위나 공직을 받거나 은사금을 받은 기록이 없어서 친일인사로 분류되는 인물은 아니다. 하지만 아내 윤고라(尹高羅, 1891~1913)는 부친 김윤정(金潤晶)이 일제에 적극 협력한 친일파로 기록되어있다. 5
▲ 윤치오 부인, 이숙경의 부고 【황성신문 1907.01.28】

 

딸의 출생일이 모친의 사망일보다 늦을 수는 없으니 위키백과는 이숙경의 사망일자를 1909년으로 기입하고 있는데, 이 때문에 정작 윤치오의 행적을 적어놓은 본문에서 모순이 발생하고 있다.

 

윤치오(尹致旿, 1869~1950)는 일제로부터 작위나 공직을 받거나 은사금을 받은 기록이 없어서 친일인사로 분류되는 인물은 아니다. 하지만 아내 윤고라(尹高羅, 1891~1913)는 부친 김윤정(金潤晶)이 일제에 적극 협력한 친일파로 기록되어있다. 7
▲ 위키백과의 이숙경 사망날짜

 

저 사망 날짜대로라면 윤치오는 멀쩡히 아내가 살아있는데도 불구하고 1907년에 공개구혼 광고를 신문에 내고, 1908년에는 새아내 윤고라를 공개석상에 대동하고 다닌 파렴치한이 된다.

 

윤치오(尹致旿, 1869~1950)는 일제로부터 작위나 공직을 받거나 은사금을 받은 기록이 없어서 친일인사로 분류되는 인물은 아니다. 하지만 아내 윤고라(尹高羅, 1891~1913)는 부친 김윤정(金潤晶)이 일제에 적극 협력한 친일파로 기록되어있다. 9
▲ 1908년 아내 윤고라와 활동했다는 위키백과의 내용

 

윤정선은 윤고라의 무남독녀


해평 윤씨 가계도
를 보면 윤치오는 정확히 자녀를 8명 두고 있다.

 

윤치오(尹致旿, 1869~1950)는 일제로부터 작위나 공직을 받거나 은사금을 받은 기록이 없어서 친일인사로 분류되는 인물은 아니다. 하지만 아내 윤고라(尹高羅, 1891~1913)는 부친 김윤정(金潤晶)이 일제에 적극 협력한 친일파로 기록되어있다. 11
▲ 한자는 남자, 한글은 여자이다. 네모안은 아내와 사위

 

8명의 자녀들 중 장남 윤일선(尹日善) 박사는 ‘우리 5남매는 미국에서 오신 계모(윤고라)로부터 영어를 착실하게 배울 수 있었다‘는 회고(아래)를 남기고 있기 때문에 이 다섯 명은 첫째 부인 이숙경 슬하의 친남매들임을 알 수 있다.

 

윤치오(尹致旿, 1869~1950)는 일제로부터 작위나 공직을 받거나 은사금을 받은 기록이 없어서 친일인사로 분류되는 인물은 아니다. 하지만 아내 윤고라(尹高羅, 1891~1913)는 부친 김윤정(金潤晶)이 일제에 적극 협력한 친일파로 기록되어있다. 13
▲ 윤일선의 회고록 ‘나의 학문편역’ 일부분. 1907년 모친사망과 5남매와 계모(윤고라)의 만남을 기록하고 있다.

 

나머지 3명 중 윤영선(尹暎善)과, 윤효선(尹曉善)은 셋째 부인 현송자(玄松子, 1899~1978)와의 사이에서 낳은 자녀들. 그러므로 마지막 남은 윤정선은 매일신보의 기사대로 윤치오가 윤고라와의 사이에서 얻은 자녀이다.

 

• 윤일선(尹日善): 이숙경의 아들
• 윤명선(尹明善): 이숙경의 아들

• 윤왕선(尹旺善): 이숙경의 아들
• 윤승선(尹昇善): 이숙경의 아들
• 윤영선(尹暎善): 현송자의 아들
• 윤시선(尹時善): 이숙경의 딸
• 윤정선(尹晶善): 윤고라의 딸
• 윤효선(尹曉善): 현송자의 딸


또 위키백과는 윤고라의 자녀를 3명(윤융희, 윤욱선, 윤창선)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나름 하와이에서 발행되던 ‘국민보(國民報)’라는 신문을 근거로 하고 있다.

윤치오(尹致旿, 1869~1950)는 일제로부터 작위나 공직을 받거나 은사금을 받은 기록이 없어서 친일인사로 분류되는 인물은 아니다. 하지만 아내 윤고라(尹高羅, 1891~1913)는 부친 김윤정(金潤晶)이 일제에 적극 협력한 친일파로 기록되어있다. 15
▲ 1914년 1월 7일 국민보 기사에서 언급된 자녀 이름(륭희, 욱선, 창선)

 

하지만 위에서 설명했듯이 기사 속의 이름들은 해평 윤씨 가계도에 없다. 하와이에서 발행하다 보니 제대로 가족관계를 확인하지 않고 기사를 작성한 것일까. 국민보는 윤고라의 사망 날짜도 12월 2일로 잘못 기록하는 등 신빙성이 떨어진다.

 

게다가 5년 정도의 짧은 결혼생활 속에서도 교육사업을 했던 윤고라의 활동을 볼 때 상식적으로 아이를 3명이나 가졌다기엔 무리가 있어 보인다.

 

윤치오(尹致旿, 1869~1950)는 일제로부터 작위나 공직을 받거나 은사금을 받은 기록이 없어서 친일인사로 분류되는 인물은 아니다. 하지만 아내 윤고라(尹高羅, 1891~1913)는 부친 김윤정(金潤晶)이 일제에 적극 협력한 친일파로 기록되어있다. 17
▲ 윤고라는 첫아이를 유산하기도 했다. 【대한매일신보 1908.08.30】

 

오래된 자료라는 이유만으로 신뢰도를 높게 평가하는 경우가 많지만 사람이 쓴 이상 현대의 기사와 같이 실수나 오보는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이처럼 교차검증을 해보면 명백한 오류임을 파악할 수 있다.

 

윤정선의 결혼


윤정선은 22세였던 1930년 5월 20일 오후 4시 30분, 장곡천정(長谷川町, 현재의 소공동)의 경성공회당(京城公會堂)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상대는 김원배 씨의 차남 김종훈(25)이라는 남성.

 

윤치오(尹致旿, 1869~1950)는 일제로부터 작위나 공직을 받거나 은사금을 받은 기록이 없어서 친일인사로 분류되는 인물은 아니다. 하지만 아내 윤고라(尹高羅, 1891~1913)는 부친 김윤정(金潤晶)이 일제에 적극 협력한 친일파로 기록되어있다. 19
▲ 신부 윤정선과 신랑 김종훈

 

당시 윤정선은 이화여전(현재 이화여대) 가사과에 재학 중이었으며, 김종훈은 동경고등학교(현재의 고등학교와는 다른 고등교육기관으로 훗날 제1고등학교와 통합해 동경대학으로 전환)에 재학 중이었다.

 

윤정선이 모친을 일찍 여의고 8남매 중 친형제자매는 한 명도 없이 외롭게 자라서일까. 부부는 슬하에 5남 3녀를 두며 다복한 가정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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