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귀족의 딸 ⑧ 한상룡의 딸, 한효남

한상룡(韓相龍)은 일제시대의 금융인으로 현재는 신한은행으로 통합된 조흥은행의 전신인 한성은행 두취(頭取, 은행장)를 역임하는 등 큰 명성을 쌓았다.

 

당시 왕족과 조선귀족들의 혼례나 장례식에는 빠지지 않고 주요위원으로 이름이 등장할 정도로 권력의 중심부에 있었던 인물.

 

한상룡(韓相龍)은 일제시대의 금융인으로 현재는 신한은행으로 통합된 조흥은행의 전신인 한성은행 두취(頭取, 은행장)를 역임하는 등 큰 명성을 쌓았다. 1
▲ 한상룡(韓相龍, 1880~1947)


그는 정실부인과의 사이에 4남매(2남 2녀)를 두었는데,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당시 수재의연금 명단에 남매들의 이름이 등장하기도 했다.

 

한상룡(韓相龍)은 일제시대의 금융인으로 현재는 신한은행으로 통합된 조흥은행의 전신인 한성은행 두취(頭取, 은행장)를 역임하는 등 큰 명성을 쌓았다. 3
▲ 을축년 대홍수 수재의연금 명단 속의 한창희(韓昌熙), 한효순(韓孝順), 한효남(韓孝男), 한성희(韓盛熙) 【朝鮮新聞 1925.09.25】


이들 4남매 중 차녀이자 셋째인 한효남(韓孝男)은 1910년생으로 고종의 막내딸인 덕혜옹주(1912년생)의 또래였다.

 

그런 이유로 한효남은 덕수궁내에 덕혜옹주를 위해 만들어진 유치원에 함께 다닐 명사의 딸들 중 하나로 선별되었고, 옹주가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기 전 몸을 담았던 히노데소학교(日出小學校)에 함께 진급했다.

 

한상룡(韓相龍)은 일제시대의 금융인으로 현재는 신한은행으로 통합된 조흥은행의 전신인 한성은행 두취(頭取, 은행장)를 역임하는 등 큰 명성을 쌓았다. 5
▲ 덕혜옹주(가운데)와 유치원 동급생들


아래의 기사는 1926년 당시 17세의 나이로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현 경기여고) 3학년에 재학 중이었던 한효남을 소개한 것이다.

 

– 열아들보다 효성 있는 한효남 양
– 손끝에 빛나는 재주
– 한상룡 씨의 둘째 딸

 

오늘은 조선의 ‘은행왕’이라고 하는 한성은행 두취요, 상업회의소 부두취로 조선인 간의 원로가 되는 한상룡 씨의 따님을 소개하겠습니다.

 

금년 17세의 영롱한 규수이니 목하 시내 여자고등보통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요. 그의 이름은 효남이니 마치 ‘남의 열아들 부럽지 않게 부모에게 영화를 보이리라’는 숙명이 실린 것도 같지 않습니까.

 

효남 양은 남보다는 이지가 매우 탁월하여 집에 돌아와 수다(數多)한 아랫사람들을 거느리는데도 항상 부잣집 교만한 작은아씨네의 구각(舊殼)을 벗어나서 온공한 말씨와 눈물있는 보살핌이 미쳐서 행랑방, 침방, 찻집방의 평판이 높다고 합니다. 4남매 틈의 셋째요. 딸로서는 둘째 겸 막내 따님이라 어리광도 있으련만은, 어렸을 때부터 오직 손끝에 도는 재주가 비상히 발달되어 도화, 습자, 자수에는 항상 우수한 성적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는 한상룡 씨도 귀여운 따님이 수놓아 바치는 안경집이나 염낭을 받을 때마다 세상에 다시없는 보배같이 반기며 사교장에 나서서도 한 자랑거리를 삼으니, 평화한 가정에 빛나는 천재는 곱게곱게 북돋아 갈 뿐이올시다.

 

학교를 졸업하면 앞으로 더 공부를 계속하기보다는 얼른 출가를 시키신다는 게 그 어버이의 세상을 아는 주견이며, 가정에 있더라도 가정교사를 두어서 그림과 피아노를 배우겠다는 것이 효남 양의 이상이올시다.

【매일신보 1926.11.10】


한상룡(韓相龍)은 일제시대의 금융인으로 현재는 신한은행으로 통합된 조흥은행의 전신인 한성은행 두취(頭取, 은행장)를 역임하는 등 큰 명성을 쌓았다. 7

▲ 한효남(韓孝男)


한효남의 이름 한자에는 ‘사내 남(男)’이 사용되었는데, 보통 이런 경우 아들이 아니어서 아쉬운 마음을 담거나 다음번은 아들을 기대하는 의미로 붙여지는 경우가 많았다. 기자도 이를 알고 있었겠지만 ‘열아들 부럽지 않게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숙명의 이름이라고 좋게 해석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패륜으로 재등장한 한상룡 가족


근대 재계의 거두 한상룡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알 수 있는 것이 바로 지금까지도 남아있는 북촌 가희동한씨가옥(서울시 민속문화재 제14호)과 백인제가옥(서울시 민속문화재 제22호)이다.

– 관련 글: 한상룡의 가옥이었던 백인제가옥

 

한상룡(韓相龍)은 일제시대의 금융인으로 현재는 신한은행으로 통합된 조흥은행의 전신인 한성은행 두취(頭取, 은행장)를 역임하는 등 큰 명성을 쌓았다. 9
▲ 1938년의 한상룡. 가희동 한씨가옥(嘉會洞 韓氏 家屋) 시절의 모습이다.


명예와 부를 한껏 누린 한상룡은 해방 후 얼마 지나지 않은 1947년에 사망하였다. 그런데 그로부터 12년이 흐른 1959년, 한상룡의 가족들이 언론에 다시 등장하는데 황당하게도 ‘존속학대‘혐의였다.

 

병을 앓고 있는 고령의 노파를 변소 옆 골방에 가두고 학대한다‘는 이웃의 신고가 서대문 경찰서에 접수되었고, 조사 결과 집주인이 바로 ‘한상룡의 장남’ 한창희. 좁은 방에서 몸도 제대로 못 펴고 있는 노파는 모친 이용경(李龍卿)으로 거대한 대저택에서 명사들을 초청하던 지난시절과 너무나 대비되는 모습이었다.

 

한상룡(韓相龍)은 일제시대의 금융인으로 현재는 신한은행으로 통합된 조흥은행의 전신인 한성은행 두취(頭取, 은행장)를 역임하는 등 큰 명성을 쌓았다. 11
▲ 노모 학대로 구속된 한씨 부부 【동아일보 1959.08.27】


4남매 중 막내아들 한성희는 게이오대학을 졸업하고 전도유망한 실업가로 주목받았으나 1944년 28세의 나이로 사망했기에 한창희는 대부분의 유산을 물려받았을 외아들이었다.

 

또 열아들 부럽지 않게 부모를 모시라며 효도 ‘효(孝)’자를 붙여준 두 딸 역시 ‘출가외인의 시대’인걸 감안하더라도 이름값을 못하며 손가락질을 당했다.

4 thoughts on “조선귀족의 딸 ⑧ 한상룡의 딸, 한효남

  1. 안녕하세요, 기사에서는 1928년에 한상룡이 한성은행 경영악화 의미로 집을 내놓고 1935년 한성은행이 청년갑부에게 이 집을 판 것으로 나오는데, 본 기사 사진 하단 ‘1938년의 한상룡. 가회동 한씨가옥 시절의 모습이다’라는 설명이 의아해 문의 드립니다.

    1. 안녕하세요. 구 한상룡 가옥(백인제 가옥)과 혼동이 있으신 것 같습니다. 한상룡은 한성은행 경영악화에 책임을 지고 1928년에 백인제 가옥을 내놓았고, 1938년의 사진은 그 이후에 살았던 ‘가희동 한씨가옥’으로 별개의 가옥입니다.

      원래대로라면 둘 다 한상룡의 가옥이고 위치도 둘 다 가희동에 있기 때문에 헷갈릴 수 있는데, 현재의 명칭은 백인제 가옥과 한씨 가옥으로 구분되고 있습니다. 원래 주인에 대한 글을 쓰다 보니 백인제 가옥을 한상룡 가옥으로 지칭하면서 혼동이 생긴 것 같네요.

      1. 그렇군요. 근처로 이사를 갔던 모양이네요. 친절한 답변 감사드립니다. 더불어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콘텐츠를 올려주심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어떻게 위 정보들을 모두 모아 정리하여 게시해주셨을까 대단하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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