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8년, 타이타닉 구조선 ‘카파시아호’의 침몰 장면

1903년 5월 5일 첫 항해를 시작한 RMS 카파시아호(RMS Carpathia)는 영국 큐나드 라인(Cunard Line)의 대서양횡단 여객선으로 다른 무엇보다도 ‘타이타닉 구조선’으로 당대의 가장 큰 유명세를 얻었다.

 

당시 타이타닉이 보낸 조난신호를 수신 후 최대속도로 달려 3시간 30분(완전침몰 후 1시간 40분)만에 도착한 카파시아호는 구명보트를 타고 떠도는 승객 710명의 생명을 구해냈다.

 

1903년 5월 5일 첫 항해를 시작한 RMS 카파시아호(RMS Carpathia)는 영국 큐나드 라인(Cunard Line)의 대서양횡단 여객선으로 다른 무엇보다도 '타이타닉 구조선'으로 당대의 가장 큰 유명세를 얻었다. 1
▲ RMS 카파시아(RMS Carpathia)

 

특히 선장 아서 로스트론(Arthur Rostron, 1869~1940)의 빠른 판단이 없었다면 타이타닉호의 생존자는 단 한명도 없었을 거라는 것이 정설이다. 아서선장은 카파시아호의 난방과 온수를 차단하여 배의 모든 증기에너지를 속도를 내는데 집중시키는 결단력을 발휘했다.

 

1903년 5월 5일 첫 항해를 시작한 RMS 카파시아호(RMS Carpathia)는 영국 큐나드 라인(Cunard Line)의 대서양횡단 여객선으로 다른 무엇보다도 '타이타닉 구조선'으로 당대의 가장 큰 유명세를 얻었다. 3
▲ 카파시아호로 다가오는 타이타닉 구명정

 

카파시아호의 승객들도 이 가련한 조난자들을 위해 자신들의 따뜻한 음식과 물, 담요는 물론이고 심지어 객실까지 양보하는 등 휴머니즘을 발휘했다.

 

1903년 5월 5일 첫 항해를 시작한 RMS 카파시아호(RMS Carpathia)는 영국 큐나드 라인(Cunard Line)의 대서양횡단 여객선으로 다른 무엇보다도 '타이타닉 구조선'으로 당대의 가장 큰 유명세를 얻었다. 5
▲ 카파시아호에 승선한 생존자들

 

훗날 생존자들은 구조작업에 참여한 승무원들에게 개인이나 단체의 이름으로 각종 상패와 메달을 수여하며 고마움을 잊지 않았다.

 

하지만 카파시아호에게도 6년 후 불운이 닥쳤다.

 

제 1차세계대전(1914.07.28~1918.11.11)당시 미국과 캐나다의 군인들을 유럽전선으로 수송하는 임무를 위해 징발된 카파시아호는 1918년 7월 15일 미국 보스턴을 향해 리버풀을 출발했는데, 이때 독일제국의 잠수함 U-55가 발사한 어뢰 세발을 맞고 침몰한 것이다. 그래도 타이타닉과는 달리 223명의 승객 중 218명이 생존하였다.

 

1903년 5월 5일 첫 항해를 시작한 RMS 카파시아호(RMS Carpathia)는 영국 큐나드 라인(Cunard Line)의 대서양횡단 여객선으로 다른 무엇보다도 '타이타닉 구조선'으로 당대의 가장 큰 유명세를 얻었다. 7
▲ 가라앉는 카파시아호

 

이후 2000년에 이르러 카파시아호는 아일랜드 패스트넷 섬에서 약 190km 떨어진 수중 150m에 침몰해있는 것이 미국 다이버인 클라이브 커슬러(Clive Cussler)에게 발견되었다. 침몰한 카파시아호의 소유권은 타이타닉 유물 수천점을 소유한 Premier Exhibitions Inc.가 가지고 있으며 여러 품목들을 차례로 인양할 예정이다.

 

1903년 5월 5일 첫 항해를 시작한 RMS 카파시아호(RMS Carpathia)는 영국 큐나드 라인(Cunard Line)의 대서양횡단 여객선으로 다른 무엇보다도 '타이타닉 구조선'으로 당대의 가장 큰 유명세를 얻었다. 9
▲ 아서 로스트론에게 생존자 몰리 브라운이 컵을 수여하는 모습


난파된 카파시아에는 여러가지 역사적인 유물이 될만한 것들이 있는데, 특히 위에서 말한 타이타닉의 생존자들이 아서 로스트론 선장에게 수여한 ‘사랑의 컵(loving cup)’이라고 불리는 트로피도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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