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1년 10월 28일 오전 6시 38분, 일본 노비 평원에서 규모 8.0의 대규모 지진이 발생하였다. 이 노비지진(濃尾地震)은 일본 역사상 가장 큰 내륙 지진 중 하나로 기록되었으며, 네오다니 단층((根尾谷断層)을 진원지로 하여 현재의 기후현 모토스시(本巣市) 일대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지진으로 인한 인명피해는 사망자 7,273명, 부상자 17,175명에 달했으며, 14만 채 이상의 건물이 파괴되었다.
아래의 기록사진집은 ‘현대 지진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영국 지진학자 존 밀른(John Milne, 1850~1913)과 스코틀랜드 출신 공학자 W.K. 버튼(W.K. Burton, 1856~1899)이 내용을 저술한 책자이다.

▲ 기록사진집 표지. 이 사진집은 에치젠시(越前市)에서 생산한 종이로 만들어졌다. 에치젠시는 종이로 유명한 곳으로, 지진피해 지역에 속해 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었다.
각 사진에는 존 밀른이 작성한 전문적인 해설이 첨부되어 있다. 그는 1875년 일본에 와서 제국대학 광업 및 지질학 교수로 재직하며 일본지진학회를 설립한 인물로, 세계 최초로 지진계를 개발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 속표지. 레인크로포드(Lane, Crawford & Co.)의 요코하마 지점이 출판하였으며, 도쿄 츠키지 활자 주조소에서 인쇄되었다.
수록된 사진은 도쿄 최초로 사진관을 개업한 오가와 가즈마사(小川一眞, 1860~1929)외 2인이 지진 발생 직후부터 촬영한 것으로 추정된다.
– 사진 10, 11, 13, 14는 나고야의 미야시타 킨(宮下欽).
– 사진 16은 나고야의 나카무라 보쿠요(中村牧陽)가 촬영한 것이다.
1. 비와지마(枇杷島)

우리는 지진 발생 이틀째 밤에 나고야(名古屋)에 도착했는데, 그 밤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만한 밤이었습니다. 모든 주민들은 집의 폐허나 흔들리는 잔해 앞, 또는 거리 중앙의 열린 공간에 임시로 만든 피난처를 세우고 그 아래에서 야영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어느 정도 격식을 갖춘 호텔인 슈킨로(Shukinro)에 부탁해 남은 반쪽에 겨우 숙소를 구할 수 있었는데, 그 호텔의 다른 반쪽은 인근 벽돌 건물이 무너져 내려 완전히 부서진 상태였습니다.
저녁 식사 중에는 다가오는 지진을 알리는 듯한 멀리서 울리는 속이 빈 총소리 같은 굉음에 계속 놀랐고, 시중들은 열린 공간으로 달아났습니다. 우리는 이미 심하게 금이 간 건물을 주시하며, 진동이 심해지면 언제든 정원으로 뛰쳐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에는 비와지마라고 불리는 나고야 교외 지역을 방문했는데, 그곳은 실제로 성 근처에서 평지를 가로질러 강 쪽으로 뻗은 하나의 긴 거리였습니다. 그 파괴 정도는 완전히 무너졌다고 해도 과장이 아닐 정도였습니다.
기와지붕이나 초가지붕을 얹은 집들은 대부분 세워둔 카드가 쓰러지듯 거리선을 따라 쓰러져 있었습니다. 곳곳에서는 건물들이 거리를 가로질러 넘어져 길이 막혀 있었고, 사방에는 넓은 면적에 잔해가 널려 있었습니다. 조잡하게 지어진 집들의 잔해는 너무 심하게 부서져, 그곳이 원래 사람이 살던 주거지였다는 사실조차 상상하기 어려웠습니다.
다행히 발생한 몇 차례의 화재는 군인들에 의해 신속하게 진화되었습니다.
2. 지진 후의 생활

고야(小屋)는 거주용으로 사용되는 임시 구조물입니다. 에조(蝦夷)에서는 죄수들이 숲을 통과하는 도로를 닦을 때, 대나무와 풀로 만든 큰 헛간 같은 고야에서 생활했습니다. 지진 지역의 고야들은 짚매트, 천 조각, 종이 병풍 파편, 부서진 판자 등 폐허에서 모을 수 있는 다양한 재료로 만들어졌습니다.
*쇼(A.C. Shaw) 대보제(archdeacon)는 기후에서 고야들 사이에서 야영하며 이렇게 썼습니다.
“오늘 아침에 깨어났을 때, 평소 일본 도시의 아침을 활기차게 만드는 모든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습니다. 문을 여는 소리도 없었는데, 문들이 주인들의 머리 위로 비가 내리는 것을 막는 데 사용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깃털 먼지털이로 종이 미닫이를 두드리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미닫이들이 모두 이제 작은 오두막 측면을 위한 바람막이로 쓰이고 있었기 때문이죠. 그것이 외부 날씨로부터 유일한 보호막이었습니다.”
*알렉산더 크로프트 쇼(Alexander Croft Shaw, 1846~1902)는 토론토(캐나다) 출신으로 영국에서 사제 생활을 거친 뒤, 1873년 일본 선교사로 파견되어 영국 공사관 담당 목사 및 일본 내 초기 성공회 교회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3. 비와지마 강 제방

가장 큰 파괴는 강둑과 그 주변에서 발생했습니다. 한쪽이 지지받지 못한 강둑들이 관성에 의해 앞으로 밀려났는데, 이는 기관차가 다른 쪽 끝을 들이받을 때 일련의 철도 화차 중 마지막 차량이 앞으로 밀려나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비와지마 근처의 강둑을 따라 여러 마일에 걸쳐 다양한 균열이 발생했으며, 폭이 2피트에 이르는 수많은 세로 균열이 있었습니다. 제방의 안쪽 절반은 강 쪽으로 수직 방향으로 몇 인치에서 수 피트까지 미끄러져 내려갔습니다.
어느 한 곳에서는 제방이 약 200피트 정도 완전히 사라졌는데, 그곳에서 매우 이상한 현상이 관찰되었습니다. 제방의 뒤쪽, 즉 강과 반대편에는 큰 대나무 숲과 몇 그루의 소나무가 있었는데, 이 작은 숲이 60피트나 뒤로 미끄러지거나 밀려났음에도 대나무와 나무들은 똑바로 서 있었습니다.
또한 한 초가지붕이 온전한 상태로 떨어진 모습도 볼 수 있었는데, 나고야-기후 평야를 빽빽하게 덮고 있던 대부분의 농가들이 이와 같은 방식으로 무너졌으며, 지금도 시골 지역에는 멀리서 보면 거대한 안장 모양처럼 보이는 이런 지붕들이 점점이 흩어져 있습니다.
4. 비와지마 강 제방의 고야(小屋)

이 사진에서는 강둑을 따라 일어난 지반의 변화를 다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왼쪽에는 아직 남아 있는 몇 채의 기와집이 보이고, 오른쪽에는 매트, 병풍, 그리고 구할 수 있는 다양한 재료로 만든 ‘고야’라는 임시 오두막들이 있습니다. 무서움에 떨던 생존자들은 그 오두막 안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특히, 파괴가 극심했던 가난한 지역에서는 그런 고야조차 마련하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잔해에서 겨우 건져낸 몇 가지 초라한 소지품을 들고, 거리 한가운데 깔린 매트 위에서 임시로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5. 비와지마 다리

쇼나이 강(庄内川)을 가로지르는 넓은 목조 마차 다리인 비와지마 다리는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다리는 강바닥에 기묘하게 뱀처럼 뒤틀린 형태로 놓여 있습니다. 강물은 매우 낮고, 다리의 연속성이 실제로는 어디서도 완전히 끊어지지 않아 걸어서 건널 수 있지만, 보도가 기울어져 있어 쉽게 건너기는 어렵습니다.
사진을 보면 마치 강바닥을 따라 갑작스러운 움직임이 일어난 듯하며, 상부 하중의 관성이 이에 저항해 상부 구조가 뒤에 남고, 지지 기둥들이 급격히 상부 구조 아래에서 뽑혀나간 것처럼 보입니다.
강둑과 그 위에 있는 집들은 비교적 온전하지만, 상상하기는 어렵더라도 강바닥이 강둑보다 더 큰 움직임을 전달했다는 점을 시사합니다.
6. 나고야 방직공장

방직공장은 지하실과 2층으로 이루어진 큰 벽돌 건물이며, 건물 한쪽 끝에서 중간쯤에는 한 층 더 높은 탑이 있습니다. 건물은 심각하게 파괴된 상태로, 벽의 절반 정도만 남아 있고 그마저도 갈라지고 뒤틀리며 반쯤 무너져 있습니다.
450명 중 35명이 사망하고 113명이 심하게 다쳤습니다. 출입구는 모두 건물 중앙 근처에 있었는데, 탑이 무너지면서 모든 층을 관통해 지하실까지 떨어져 탈출하려던 군중 한가운데를 덮쳤습니다. 관리자인 하토리(S. Hattori) 씨는 떨어지는 잔해를 불과 2피트 차이로 피해 가까스로 탈출했습니다.
지진이 자주 발생하는 지역에서 건물을 지을 때는 문이나 출구가 쉽게 접근 가능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나고야 공장에서의 참사는 우리가 반드시 교훈으로 삼아야 할 사례입니다.
사진을 보면 벽이 상당히 두꺼움에도 불구하고 벽돌들이 분리된 형태로 남아 있어, 모르타르의 접착력이 충분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탑의 창문 위에 생긴 균열은 벽의 개구부가 약점선을 형성한다는 점을 보여주며, 건축 시 특별한 주의가 필요함을 시사합니다.
7. 나고야 방직공장

사진에서 우리는 높은 굴뚝의 상부가 전복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폐허를 보면, 건물에 있던 사람들 중 7~8퍼센트가 즉사했고 약 3분의 1이 부상을 입은 것은 놀랍지 않으며, 오히려 아무도 다치지 않고 탈출한 사람이 있었다는 점이 더 놀랍습니다. 이는 벽이 무너지기 전에 건물에서 빠져나올 시간이 거의 없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방직공장에서는 지진의 강도가 특별히 심하지 않았으며, 근처의 일본 가옥들도 크게 손상되지 않았습니다. 위층의 파괴는 분명히 트러스 연결보에 대한 벽들의 갑작스러운 움직임으로 인해 발생했으며, 무거운 지붕 하중이 이 움직임에 저항하면서 지붕이 떨어진 쪽 벽이 바깥쪽으로 밀려나고, 반대쪽 벽은 안쪽으로 기울어졌습니다.
부러진 굴뚝은 분명히 두 동강 났는데, 이는 갑작스러운 움직임으로 가벼운 낚싯대를 부러뜨리는 것과 같은 방식이며, 도쿄, 요코하마 등 다른 지역에서 파괴된 굴뚝들과 유사한 모습입니다.
한 관찰자는 굴뚝이 좌우로 흔들리고, 갈라지고, 분리된 후, 한두 차례 더 흔들리다가 넘어지는 모습을 목격했다고 묘사했습니다.
8. 지진 후의 생활

여기서 우리는 전경에 임시 오두막이나 고야(小屋)가 있고, 그 뒤에는 부서진 기와가 바다처럼 펼쳐져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타버린 것들은 모두 화재로 인해 소실되었습니다.
일본은 흔히 지진의 땅이라고 불리지만, 동시에 화재의 땅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두 재해는 각각 따로 발생하기도 하지만, 한쪽이 다른 쪽의 원인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1854년 도쿄에서 발생한 큰 지진의 피해는 화재로 인해 더욱 심각해졌습니다. 오가키(大垣), 기후(岐阜) 등 여러 지역에서도 첫 번째 큰 충격 직후 폐허 사이에서 화재가 발생해, 그렇지 않았다면 탈출할 수 있었을 많은 사람들이 산 채로 불에 타 숨졌습니다.
9. 나고야에서 기후로 가는 길

나고야(名古屋)에서 기후(岐阜)로 가는 길은 여러 마을이 연이어 이어지는 형태로, 일본에서는 매우 흔한 풍경입니다. 즉, 25마일이 넘는 거의 끊김 없는 거리였습니다. 그러나 1891년 11월 3일 당시, 기후는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한때 집이었던 두 줄의 긴 잔해 더미 사이에 난 좁은 골목에 불과했습니다.
지진으로 무너진 집들이 끝없이 이어지는 모습은 처음에는 신기하고 흥미롭게 느껴질 수 있지만, 같은 광경이 계속 반복되다 보면 점차 소름 끼치는 느낌이 들게 됩니다. 마치 악몽을 꾸는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최근 지진에서 얻은 한 가지 교훈은, 유럽식 목조 구조물이 일반적인 일본식 주택보다 지진에 더 잘 견딘다는 점입니다. 일본 가옥은 무거운 지붕, 대각선 보강재의 부재, 그리고 *장부구멍 등 다양한 이음새를 만들면서 구조재가 원래 강도의 절반 이하로 약해진 가벼운 지지대를 사용합니다. 무거운 지붕이 흔들리면 지지대의 밑부분이 견디지 못해 전체 구조물이 무너져 아래에 있는 모든 것을 짓누르거나 매몰시킵니다.
목재로 지어진 도시는 지속적인 상업적 번영을 이루기 어렵다는 말이 있지만, 그 타당성은 아직 확실히 결정된 바 없습니다. 샌프란시스코는 목재에서 석재로 점차 전환되고 있지만, 그곳의 부유한 주민들이 소유한 많은 아름다운 저택들은 목재로도 충분히 훌륭한 건축이 가능함을 보여줍니다. 또한 뉴질랜드의 번영하는 수도 웰링턴 역시 목재 도시로, 지진이 자주 발생하고 강도가 크기 때문에 석조보다 목재가 더 선호되고 있습니다.
지진에 견디기 위해서는 목재나 벽돌로 건축할 수 있습니다. 목재는 화재 위험이 크지만 저렴해 일반인들에게 적합하고, 벽돌은 비정상적으로 튼튼하게 만들어야 하므로 비용이 많이 들어 특별한 건물에만 적합합니다.
*장부구멍: 목재 부재를 연결할 때 사용하는 홈
10. 뒤틀린 철도선

첨부된 사진에는 지진 운동의 성질을 밝히는 몇 가지 중요한 점들이 있어, 주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철로와 침목이 자갈 받침 안에서 앞뒤와 좌우로 움직였거나, 혹은 철로와 침목은 그대로 있고 그 아래 땅이 움직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움직임으로 인해 침목 사이에 자갈이 쌓여, 거대한 베개처럼 평행하게 늘어선 모습이 나타납니다. 침목과 주변 자갈 사이의 움직임은 많은 곳에서 5~6인치에 이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특징은 선로의 뱀처럼 구불구불한 굴곡입니다. 금속이 휘어진 것뿐만 아니라 제방도 평행하게 변형되었습니다. 이 지역과 다른 곳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나는데, 이는 영구적인 세로 압축을 받은 결과로 보입니다. 이런 굴곡마다, 사진에는 나타나지 않았지만, 선로 양쪽에 지역 윤곽의 약간의 함몰이 보이는데, 이는 옛 물길의 흔적일 수 있으며, 그곳의 재료가 다른 곳보다 부드러워 굴복이 쉽거나 더 많은 움직임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11. 기소 강 다리

기소 강(木曽川) 다리는 길이 1800피트로, 이 철도 구간에서 가장 뛰어난 다리 중 하나입니다. 200피트 길이의 거더(Girder)들이 높이 15~30피트, 단면 20피트 × 10피트인 벽돌 교각 위에 지지되어 있습니다. 각 교각은 수위에서 아치로 연결된 두 개의 *우물에서 올라오며, 교각의 가장 낮은 부분인 이 아치에서 균열이 발생했습니다.
따라서 균열은 기둥의 가장 좁은 치수를 가로지르거나 통과해 발생했습니다. 교각 사이 거리가 줄어든 것은 기초의 측면 이동에 따른 영구적인 압축의 결과이며, 만약 다리가 강바닥을 가로지르는 선으로 표현되었다면, 하나 이상의 뱀처럼 구부러진 형태로 비틀어졌을 것입니다.
*우물: 교각의 기초를 이루는 깊은 원통형 구조물
12. 지진 후의 생활

여기서는 이전보다 조금 더 나은 형태의 고야 몇 채를 볼 수 있습니다. 몇 개의 냄비와 팬이 남아 있고, 적어도 날씨로부터 어느 정도 보호를 받을 수 있는 상태입니다. 우리는 직접 본 모습만을 묘사했지만, 황폐해진 지역 전체의 모든 마을과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작은 마을들에서도 이와 같은 상황이 이어지고 있으며, 약 50만 명의 사람들이 사진에 나온 것보다 더 나은 피난처조차 마련하지 못한 채 생활하고 있습니다.
여러 날 동안, 여진이 계속되는 가운데 모든 마을에서는 남자들과 소년들이 저녁부터 아침까지 거리를 순찰하며 소리치고, 고함을 지르고, 노래하고, 막대기를 서로 두드리거나 북을 치며 밤을 소란스럽게 만들었습니다.
이 소란의 이유를 묻자, 그들은 도둑을 쫓아내고, 사람들에게 화재를 경계하도록 경고하며, 더 큰 충격이 올 수 있다는 사실을 모두가 잊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고 답했습니다.
어떤 곳에서는 “지신! 지신!”(지진! 지진!)이라고 외쳤고, 또 다른 곳에서는 “요나오리! 요나오리!”(‘요’는 우주, ‘나오리’는 정착한다는 뜻으로, 무언가가 우주의 질서를 방해했다는 의미)라고 소리쳤습니다.
13. 비와지마 철교

지진 발생 후 며칠 동안, 아직 잔해를 치우기 전 비와지마 강(枇杷島川) 근처의 벽돌 철교는 매우 기이한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원래 수직이었던 교대(橋臺, Abutment)들은 확연히 좌우로 뒤로 밀려났고, 이 교대들이 지탱하던 아치는 도로를 가로막는 두 개의 거대한 사분원 모양 덩어리로 남아 있었습니다. 사진에는 아치 구조물의 한 덩어리가 보이며, 벽돌이 정교하게 쌓여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원래 아치 위에 놓여 있던 철로와 침목은 아직 제자리에 남아 있습니다.
이 재해의 한 가지 설명으로, 좌우의 제방이 먼저 무너지고, 갈라져 내려앉은 아치의 무게와 추력이 *토글 조인트처럼 작용해 교대들을 뒤로 밀어냈다는 견해가 있습니다. 하지만 교대들은 제방이 건설되기 전부터 아치를 지지하고 있었으므로, 아치의 토글 조인트 작용이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더라도, 실제로는 한두 개의 교대가 먼저 지진의 충격으로 뒤로 밀려났을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원인이 무엇이든, 이 사례는 아치 구조물이 수평 방향의 지진에 취약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며, 여러 지진 다발 국가에서 일반적인 아치 구조가 금지되는 이유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토글 조인트: 두 막대가 핀으로 연결된 접이식 관절 구조로, 막대가 일직선에 가까워질수록 매우 큰 힘을 전달할 수 있는 기계적 원리이다. 건축에서는 아치 구조가 수평 힘을 받을 때 교대가 바깥쪽으로 밀려나는 현상을 설명할 때 비유적으로 사용된다.
14. 지진 후의 기후(岐阜)

사진은 첫 번째 큰 충격 직후 즉시 일어난 화재를 피한 기후(岐阜)의 일부를 보여줍니다.
15. 구로다 병원

구로다(黒田)에서 우리는 처음으로 병원 업무를 목격했습니다. 그것을 병원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실제로는 대나무 기둥에 커튼을 둘러쳐 외부의 시선을 막은 공간에 한두 개의 매트만 깔려 있을 뿐이었습니다. 가구는 전혀 없었지만, 필요한 도구와 외과 수술 기구는 갖추어져 있었습니다.
우리가 그곳에 머무는 동안 환자들은 임시로 만든 들것이나 손수레에 실려 들어왔습니다. 한 매우 나이 든 여성이 중년 남성의 등에 업혀 들어왔는데, 아마도 그녀의 아들이었을 것입니다. 하느님만이 아시겠지만, 그가 얼마나 먼 거리에서 그녀를 이 낯선 병원까지 업고 왔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이 병원은 수 마일 반경의 모든 지역을 담당해야 했습니다. 우리가 병원에 있는 동안 여러 외과의사들이 치료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환자가 계속 들어왔는데, 이는 큰 재해가 발생한 지 여섯째 날의 일이었습니다.
우리가 본 환자들은 대부분 노인이었는데, 그들이 보여준 놀라운 인내심에 감탄했습니다.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한쪽에서는 한 환자가 팔에 수술을 받고 있었고, 오른쪽에서는 한 여성이 임시 카고(駕籠, kago)나 들것에 실려 들어오고 있습니다.
16. 제국대학 병원

지진은 28일 아침 일찍 발생했지만, 재해의 실제 규모와 성격이 파악된 것은 30일이 되어서였습니다. 그때 의사들이 각 방면에서 파견되었습니다. 현장에는 가장 먼저 적십자사 회원들이 도착했고, 몇 시간 뒤 제국대학 병원의 의료진이 뒤따랐습니다. 이후 궁내부, 해군, 육군, 그리고 선교부의 의사들도 합류해 인력이 늘어났습니다.
무너진 집들의 폐허 위에, 그 잔해를 활용해 세운 대학 병원에서 F. 스크리바(F. Scriba, 1848~1905) 박사와 동료들은 10일 동안 800명의 환자를 치료했습니다. 12월 1일까지, 의사들의 숙소이기도 했던 이 시설의 누적 환자 수는 1,150명에 달했고, 하루 평균 120명이 치료를 받았습니다.
특히 척추와 골반의 단순 및 복합 골절이 흔했습니다. 방치로 인해 많은 상처가 더럽고 곪아 있었으며, 일부는 구더기로 덮여 있었습니다. 많은 환자들이 열이 나고 파상풍이나 *단독으로 고생했습니다. 그러나 강력한 방부 치료와 세심한 보살핌 덕분에 1,150명 중 단 4명만이 사망하는 좋은 치료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이와 같은 재해가 유럽 사회를 덮쳤을 때는 여성들이 히스테리를 일으키고, 남성들은 신경이 쇠약해지며, 많은 사람들이 공포로 인해 이성을 잃는 경우가 흔합니다. 하지만 기후 지진 이후의 경험에 따르면, 일본인들은 신경 흥분이 일반적인 정신 마비로 나타나기보다는 파상풍, 척추 및 기타 신체적 문제의 형태로 더 자주 나타났습니다. 유럽인들이 일본인들보다 더 신경질적이고 쉽게 흥분하는 이유는, 아마도 일본인들이 자연의 가장 큰 공포 중 하나인 지진과 화산 현상 속에서 성장해왔기 때문일 것입니다.
만약 영국이나 다른 유럽 국가들이 일본처럼 자주 강력한 지진에 시달리고, 런던과 여러 도시가 평지처럼 무너지고, 영국 해안이 해일로 범람하며, 산들이 물처럼 흘러내리고, 우리가 영구적이라 여기는 모든 것이 반복적으로 파괴된다면, 그런 현상들이 국민성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질문해볼 수 있습니다.
영속성에 대한 개념이 무너지고, 미래에 대한 무관심이 생기며, 일반적인 소심함이 커질 수 있는데, 이러한 소심함은 공동체 내 약한 구성원들에게 생존 경쟁에서 심각한 장애로 작용할 것입니다.
*단독: 피부에 생기는 급성 세균성 감염증(erysipelas, 丹毒)
17. 가사마쓰(笠松)

가사마쓰의 기소강을 가로지르는 보행교는 그냥 사라져버렸고, 어디에 있었는지 보여주는 것이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배를 타고 건너가서 가사마쓰가 있던 곳으로 가지만, 그 곳에 남은 것은 기와와 다른 불에 타지 않는 물건들의 붉은 색 평야뿐이며, 우리가 그곳에 있을 때는 여전히 연기가 나고 있었습니다. 지진 후 화재가 일어났고, 도시가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전경에서 보듯이 생존자들이 깨지지 않은 기와 몇 개를 모으고 있는데, 분명히 적어도 무언가를 구하려는 희망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배경에는 한두 개의 건물이 아직 서 있습니다. 큰 철제 솥은 아마도 어떤 사찰의 것으로 물을 담거나 쌀을 끓이는 데 사용되었을 것입니다. 또는 간장을 제조하는 공장에서 남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가사마쓰의 기소강을 가로지르던 보행교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어디에 있었는지조차 알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배를 타고 가사마쓰가 있던 곳으로 건너갔지만, 그곳에는 기와와 불에 타지 않은 물건들만이 붉게 흩어진 평야가 남아 있었고, 우리가 도착했을 때도 여전히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습니다. 지진 이후 화재가 발생해 도시는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전경을 보면, 생존자들이 깨지지 않은 기와 몇 개를 모으고 있는데, 적어도 무언가를 구하려는 희망이 남아 있는 듯했습니다. 배경에는 한두 채의 건물만이 아직 남아 서 있었습니다. 큰 철제 솥은 아마도 어느 사찰에서 물을 담거나 쌀을 끓이는 데 사용되던 것이었을 것입니다. 혹은 간장 공장에서 남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18. 지진 후 임시 상점

여기저기에서 쌀 경단 몇 개나 감 몇 개 등 팔 것이 있는 사람들이 길가에 노점을 차려 놓았습니다.
철도 노선의 일부 구간은 도로보다 피해가 적어 통로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이런 길가 노점들이 몇백 야드마다 이어져 있었습니다. 어디서나(글을 쓰는 현재 시점에도) 가장 필요한 물품은 식량과 의복이었습니다.
정부, 여러 선교 단체, 그리고 케일(Keil)과 심(Sim) 같은 개인 활동가들이 이러한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한 일은 아무리 칭찬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특히 O. 케일(O. Keil) 씨의 이름은 일본에서 오랫동안 기억되어야 할 것입니다.
19. 가사마쓰(笠松)

17번 사진에 대해 언급한 모든 내용이 이 사진에도 해당됩니다. 그림에는 몇 채의 고야(임시 오두막)나 피난처가 보이며, 사람들이 잔해에서 건져낸 몇 개의 통과 팬 주위에 앉아 있습니다.
가운데 놓인 큰 나무 통들은 분명히 된장이나 간장 공장이 있었던 자리를 나타냅니다. 무거운 지붕을 얹고, 진흙으로 채운 대나무 격자와 목재로 지어진 두 개의 창고(쿠라)는 지진의 흔들림에도 비교적 잘 견뎠습니다.
이 창고들과 나무들을 제외하면, 나머지 모든 것은 평야와 같은 높이로 완전히 평평해졌습니다.
20. 네오 다니(根尾谷)

여기서는 유명한 네오 계곡(根尾谷, ねおだに)의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이곳은 지진 피해가 실제로 가장 극심했던 지역입니다. 어떤 곳에서는 지반이 내려앉고, 다른 곳에서는 솟아올랐으며, 산 자체가 내려앉아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언덕들이 이제는 모습을 드러냈다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사진의 왼쪽에는 가벼운 캔틸레버(cantilever) 다리의 일부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가운데 경간(central span)을 이루던 구조물은 아래로 떨어졌고, 다리처럼 보이는 두 개의 지지대는 캔틸레버와 거의 평행하게 놓여 있습니다.
다리의 수평 부분을 원래 위치로 복원해 보면, 배경의 대나무 사이에 서 있는 어두운 삼나무 앞에 있었을 두 번째 지지대 쌍과 오른쪽 캔틸레버가 쓸려나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지반이 가라앉거나, 강한 흔들림으로 인해 좌우로 퍼졌기 때문입니다.
21. 네오 다니(根尾谷)

히나타(日向)에서 약 5마일 위쪽에서 우리는 예상치 못한 장애물을 만났습니다. 이곳에서 강을 건너야 했지만, 캔틸레버 다리의 중앙 부분이 지진으로 완전히 파괴되어 있었고, 비로 인해 강을 걸어서 건널 수 없었습니다.
중앙 경간의 작은 일부가 사진의 왼쪽 모서리에 보입니다. 다리를 파괴한 힘이 개천 반대편 제방의 통로를 지지하고 있던 돌담을 무너뜨리지 못했다는 점이 놀랍습니다.
지반 운동이 가장 심했던 곳은 네오 계곡을 따라 형성된 지역이었습니다. 여러 마일에 걸쳐 계곡을 따라 이어지는 단층으로 보이는 부분이 제방과 같은 경사로 나타나 있는데, 계곡의 서쪽 지반이 동쪽보다 20~50피트(약 6~15미터) 아래로 가라앉았습니다.
22. 이타슈 근처, 네오 다니(根尾谷)

어느 곳에서는 네다섯 채의 집이 한 무리로 완전히 땅속으로 가라앉았습니다. 이 집들이 있던 지반은 주변의 좁은 거리 전체에 걸쳐 약 15피트(약 4.5미터) 깊이로 내려앉았고, 함몰부의 측면은 상당히 가파른 상태였습니다.
특히 이상한 점은, 집들이 마치 스스로 이 부드럽게 함몰된 지반 속으로 파고든 것처럼 보인다는 점입니다. 지붕만 남아 있고, 그 아래를 들여다보면 다른 무너진 집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어지러운 잔해 더미 대신 단순히 지표면만 있을 뿐, 실내와 실외의 높이가 같습니다.
지진 당시 집 안에 있던 사람들은 얼마나 깊은지 알 수 없는 땅속에 그대로 묻혔습니다. 시신을 수습하려는 시도는 없었는데, 죽은 자보다 산 자를 우선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23. 네오 다니(根尾谷)의 산사태

첨부된 사진에서 산의 측면에 나타난 밝은 색 부분들은 산사태로 인해 풀과 숲이 벗겨진 지역입니다. 위에서 미끄러져 내려온 산사태 덩어리 중 하나가 전경에 보이는데, 나무들이 똑바로 선 채로 함께 이동한 모습입니다.
미노(美濃)와 에치젠(越前) 사이의 산들 곳곳에서 발생했을 가능성이 높은 이러한 산사태들은 계곡을 가로질러 댐을 형성했을 수 있습니다. 이 댐 뒤에 물이 고여 연못이나 호수가 만들어지고, 1854년 같은 지역의 지진 때처럼 댐이 나중에 무너진다면, 그로 인한 피해가 지진 자체에 버금갈 수 있습니다.
대지진 이후 며칠 동안 산사태가 계속 이어졌고, 이를 목격한 방문객들은 산에서 들려오는 굉음과 진동에 깊은 인상을 받아, 평야 여러 곳에서 들리는 원거리의 굉음이나 대포 같은 소리가 산의 흔들림의 결과가 아니라 오히려 원인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나고야(名古屋)와 다른 지역에서 소리가 흔들림보다 앞서 나타나는 시간 간격(0.5초에서 5초)을 주의 깊게 관찰한 다나카다테 교수(田中舘愛橘, たなかだて あいきつ, 1856~1952)는, 다른 지진학자들과 함께 이러한 소리들이 땅을 통해 전달되며, 뒤따르는 흔들림에 앞서고 연속되는 미세한 파동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24. 나가라강 철교

이 사진에서는 부러진 주철 교각들이 거대한 당근 조각처럼 강의 마른 자갈 바닥에 흩어져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다리의 원래 선이 중앙 부분에서 상류 쪽으로 휘어진 것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제방의 균열이 강과 평행하게 나타난다는 것은, 땅이 강을 따라 길게 금이 갔다는 의미이며, 이는 강을 가로지르는 방향(직각 방향)으로 땅이 움직였거나 그런 힘이 작용했음을 시사합니다. 이곳 역시 다른 다리들과 마찬가지로, 특히 강바닥 중앙에서 발생한 움직임들이 상류나 하류 방향으로 광범위하고 영구적인 변위를 일으킨 것으로 보입니다.
기술자들이 나가라강(長良川)과 다른 강의 바닥에서 경험한 이처럼 큰 전체적 변위에 견딜 수 있는 다리를 과연 건설할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교각이 더 넓은 기초 위에 세워지고, 연철로 만들어져 에펠탑과 같은 구조를 가졌다면 파괴를 피할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측면 이동과 구부러짐까지 완전히 막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25. 나가라 강 철교

기후(岐阜)와 오가키(大垣) 사이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나가라 강(長良川) 위에 놓인 철교로, 이 다리는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다리의 주요 구조는 넓은 경간(span)을 가진 다섯 개의 독립적인 트러스 거더(Truss Girder)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중 하나의 양 끝 교각이 완전히 무너져, 해당 거더가 통째로 강바닥으로 떨어졌습니다. 언급된 두 교각의 양쪽에 있는 다른 교각들은 부분적으로 파손되어, 그 사이에 놓인 거더들은 한쪽 끝이 강바닥에 닿아 있고, 다른 쪽 끝은 부분적으로 무너진 교각 위에 걸쳐 있습니다. 나머지 거더들은 원래 위치에 있거나 거의 그 자리에 남아 있습니다.
이 다리의 붕괴 원인은 명백하게 교각의 붕괴입니다. 떨어진 거더를 포함해, 거더 자체는 전체적으로 곧고 큰 손상 없이 남아 있습니다.
각 교각은 여러 개의 주철기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기둥들은 내부 플랜지(flange)로 서로 연결되어 있고, 안에는 콘크리트가 채워져 있습니다. 여러 기둥 집합체는 연철 타이로 서로 묶여 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기둥은 플랜지 바로 위나 아래에서 길이에 직각으로 부러졌습니다. 또한, 떨어진 다리 부분이 남아 있는 부분에 비해 직선에서 상당히 벗어난 위치에 놓여 있다는 점도 다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조사 결과, 이 변위는 단순히 다리 상부 구조물만 이동한 것이 아니라, 나선형 말뚝(screw pile) 기초와 함께 지반 자체가 상류 방향으로 몇 피트 이동한 것임이 밝혀졌습니다.
26. 나가라 강 철교 접근로

나가라 강(長良川) 다리로 이어지는 제방 접근로는 규칙적인 파도 모양의 기복으로 변해, 그 정도가 심해 동쪽 교대에서 선로를 따라 동쪽을 바라보면 마치 *스위치백 철도(Switchback railway)를 보는 듯한 모습입니다.
이렇게 보이는 긴 파도 같은 곡선의 원인은 선로를 따라 아코디언처럼 압축이 일어났거나, 파도의 함몰된 부분 아래에서 실제로 침강이 발생했거나, 또는 특정 지점에서 제방이 옆으로 퍼졌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여러 다리의 교대 근처에서 볼 수 있듯, 제방이 사라진 것은 분명히 느슨하게 결합된 자재들이 지진의 흔들림으로 인해 흩어졌기 때문입니다.
*스위치백 철도(Switchback railway): 경사가 급한 산악 지형에서 열차가 오르내릴 수 있도록 만든 지그재그 형태의 철도.
27. 나가라 강 다리 전경

이 사진은 나가라강(長良川)을 가로지르는 다리에서 발생한 파괴의 전반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큰 하천을 가로지르는 다섯 개의 긴 거더(각각 200피트 경간)가 있으며, 양쪽 끝에는 더 짧고 가벼운 거더 두 개가 짧은 교각 위에 지지되어 있습니다.
더 긴 교각들이 가장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C.A.W. 포널(C.A.W. Pownall) 토목기사가 설계한 이 철교들은 지난 5년 동안 모든 일상 교통뿐만 아니라, 주변 지역을 황폐화시킨 이례적으로 심한 홍수와 기관차를 전복시키고 벽돌 굴뚝과 건물들을 무너뜨린 태풍의 힘도 손상 없이 견뎌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강둑이 건설 자재의 바깥쪽 흔들림으로 평평해지지 않은 곳에서는 균열이 발생해,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혼란스러운 상태로 변해 있습니다.
*C.A.W. 포널(C.A.W. Pownall): 메이지 시대 일본 전역의 철도교량 설계와 시공을 총괄한 영국인 토목기사로, 일본 근대 철도 인프라와 교량기술 발전에 중대한 공헌을 한 인물이다.
28. 나가라 강 철교

실험적 조사 결과, 기둥이나 벽의 성질과 치수, 그리고 그 위에 가해지는 하중을 알면, 해당 구조물이 견딜 수 있는 충격이나 가속도를 계산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예상되는 최대 움직임의 급작스러움을 가정하고, 운반해야 할 하중과 그 하중이 작용하는 높이를 알면, 지지대의 치수를 결정할 수 있습니다. 구조물이 지면을 떠나는 지점에서 가장 큰 변형이 발생하므로, 강도나 치수는 상부보다 그 지점에서 더 크게 설계해야 합니다.
교각이 짧고 강둑 가까이에 위치한 경우, 그 움직임의 급작스러움은 초당 몇 피트 이하였을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반면, 교각이 상대적으로 높고 파괴된 하천 중앙에서는 움직임의 급작스러움이 초당 몇 피트 이상이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지진으로 부분적으로 파괴된 다리는 일종의 지진계 역할을 하며, 미래의 건설 설계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인 지진 움직임의 속도를 추정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29. 지진 후의 생활

이 사진은 기와 더미 속에서 발견한 몇 가지 소중한 물건을 함께 옮기는 두 여성을 보여줍니다. 배경에는 한때 사찰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울타리가 남아 있습니다. 나고야(名古屋)에서 기후(岐阜)까지 이어지는 평야 전역에는 이와 같은 파괴가 수 마일에 걸쳐 펼쳐져 있습니다.
도시에서는 거리마다 폐허가 가득한데, 이는 일본 가옥이 앞쪽이 열려 있는 구조라 지진이 발생하면 앞으로 무너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특히 거리가 좁은 곳에서는(좁은 거리는 일본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집에서 탈출하는 것이 곧 밖에서 목숨을 잃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이 사진이 촬영된 오가키(大垣)에서는 8,000채 중 약 30채만 남았고, 남은 폐허마저 화재로 소실되어 고야(小屋)조차 짓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여행자는 이런 잔해의 바다를 지나거나 그 위를 걸으며 신기하고도 감동적인 장면들을 자주 목격했습니다. 예를 들어, 무너진 집의 폐허 위에 깔린 매트 위에 아기들과 어린이들이 모여 있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기와 조각과 막대기로 즉석에서 만든 장난감을 가지고 수다를 떨며 놀고 있었는데, 그들이 앉아 있는 폐허는 어쩌면 부모의 무덤일 수도 있었습니다. 버튼(Mr. Burton) 씨는 깨진 기와 더미 한가운데 앉아, 물병에 꽂힌 몇 송이의 국화꽃을 돌보고 있는 어린 소녀를 보았다고 묘사했습니다. 그녀가 그 꽃을 어디서 구했는지는 하느님만이 아실 것입니다.
30. 오가키의 폐허

이 사진은 지진 후 며칠 동안 여러 도시의 폐허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장면을 보여줍니다. 굶주린 생존자들이 폐허 속에서 기와와 목재 조각을 뒤지며 음식을 찾고 있습니다. 고통스러운 표정과 심지어 기아의 징후가 곳곳에서 목격되었습니다.
일본에서는 일부 관광지를 제외하면 구걸이 드물지만, 이곳에서는 노파, 남성, 어린이 할 것 없이 모두가 음식을 살 돈을 달라고 애원했습니다. 사진에는 연기와 안개 너머로 멀리 성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도시 전체가 무너진 뒤 화재로 소실되었고, 수백 명의 불쌍한 주민들이 무너진 폐허 아래에서 산 채로 타 죽었습니다.
참고문헌
- 01.
John Milne and V.K. Burton. Plates by K. Ogawa. 『The great earthquake of Japan in 1891』. Yokohama, Lane, Crawford and Co., s.d. (18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