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인 교수가 촬영한 1960년대 후반의 아프가니스탄

애리조나 주립대 교수였던 윌리엄 포들리치(William Podlich) 박사는 1967년 유네스코와 협업으로 카불 고등사범대학에서 강의하기 위해 아내 마가렛과 10대였던 두 딸 등 모든 가족이 애리조나에서 아프가니스탄 카불로 이사해 2년간 지냈다.

 

아마추어 사진작가이기도 했던 포들리치 박사는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일상을 그의 올림푸스 카메라로 기록했다. 복원된 사진들은 같은 시기 중동국가나 유럽의 여행사진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우리는 이 평화로운 일상을 누리는 아름다운 나라가 곧 파괴될 것임을 이미 알고 있다.

 

아래의 사진들은 모두 포들리치 박사가 찍은 것들로 2013년 덴버 포스트에 게재된 것이다.

 

애리조나 주립대 교수였던 윌리엄 포들리치(William Podlich) 박사는 1967년 유네스코와 협업으로 카불 고등사범대학에서 강의하기 위해 아내 마가렛과 10대였던 두 딸 등 모든 가족이 애리조나에서 아프가니스탄 카불로 이사해 2년간 지냈다. 1
▲ 아마도 온라인에서 「과거의 아프가니스탄」이라는 이름으로 가장 많이 퍼져있는 사진들 중 하나일 것이다.

 

‘과거 카불 대학교 캠퍼스의 여대생’으로도 설명된 경우도 있지만, 사실 장소는 아프가니스탄의 관광명소인 파그만 가든(Paghman Gardens)이며 두 여성은 포들리치 박사의 딸 (Jan)과 페그(Peg)이다. 물론 외국인이라 할지라도 저런 옷차림으로 관광지를 다닐 수 있다는 것은 지금이라면 상상도 못할 일이며, 파그만 가든 역시 전쟁으로 파괴되었다.

 

애리조나 주립대 교수였던 윌리엄 포들리치(William Podlich) 박사는 1967년 유네스코와 협업으로 카불 고등사범대학에서 강의하기 위해 아내 마가렛과 10대였던 두 딸 등 모든 가족이 애리조나에서 아프가니스탄 카불로 이사해 2년간 지냈다. 3
▲ 좌측에서 두 번째가 윌리엄 포들리치(William Podlich, 1915~2008) 박사.

 

애리조나 주립대 교수였던 윌리엄 포들리치(William Podlich) 박사는 1967년 유네스코와 협업으로 카불 고등사범대학에서 강의하기 위해 아내 마가렛과 10대였던 두 딸 등 모든 가족이 애리조나에서 아프가니스탄 카불로 이사해 2년간 지냈다. 5
▲ 포들리치 박사의 장녀 페그가 경치를 감상하고 있다.


그녀는 아프가니스탄에서의 경험에 대해, “가족들이 모두 함께 아프간에 갈 기회에 흥분했었죠. 고등학교 3학년을 아프간에서 지냈는데, 물론 애리조나와는 큰 문화적 차이가 있었지만 매우 흥미로운 경험이었어요. 아프간 사람들은 늘 친절하고 제게 도움을 주려고 했죠. 저는 어리숙한 10대였음에도 불구하고 그곳에서의 생활에 어려움이 전혀 없었어요.”라고 회상했다.

 

애리조나 주립대 교수였던 윌리엄 포들리치(William Podlich) 박사는 1967년 유네스코와 협업으로 카불 고등사범대학에서 강의하기 위해 아내 마가렛과 10대였던 두 딸 등 모든 가족이 애리조나에서 아프가니스탄 카불로 이사해 2년간 지냈다. 7
▲ 카불 미국 국제학교(American International School of Kabul)의 주차장. AISK는 여전히 페이스북을 통해 동창회 모임을 갖고 있지만 학교 자체는 1979년에 폐교되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애리조나 주립대 교수였던 윌리엄 포들리치(William Podlich) 박사는 1967년 유네스코와 협업으로 카불 고등사범대학에서 강의하기 위해 아내 마가렛과 10대였던 두 딸 등 모든 가족이 애리조나에서 아프가니스탄 카불로 이사해 2년간 지냈다. 9
▲ 카불 미국 국제학교(American International School of Kabul)의 강의실. 선글라스를 머리에 쓴 좌측의 여성이 페그 포들리치이다. 1967~68년 당시 AISK 학생은 약 250명이었다.

 

애리조나 주립대 교수였던 윌리엄 포들리치(William Podlich) 박사는 1967년 유네스코와 협업으로 카불 고등사범대학에서 강의하기 위해 아내 마가렛과 10대였던 두 딸 등 모든 가족이 애리조나에서 아프가니스탄 카불로 이사해 2년간 지냈다. 11
▲ 윌리엄 포들리치 박사가 2년간 가르쳤던 카불 고등사범학교 학생들.

 

앞자리에 앉은 여대생들이 현재 아프간의 기준으로 보면 충격의 미니스커트를 입고 있다. 현재 70대 노인이 되었을 이 여성들은 여타 국가와는 반대로 과거에 더 자유로운 옷차림을 하고 있었던 셈이다.

 

애리조나 주립대 교수였던 윌리엄 포들리치(William Podlich) 박사는 1967년 유네스코와 협업으로 카불 고등사범대학에서 강의하기 위해 아내 마가렛과 10대였던 두 딸 등 모든 가족이 애리조나에서 아프가니스탄 카불로 이사해 2년간 지냈다. 13
▲ 1960년대 카불대학의 여자 의대생들. 외국으로 나가지 않았다면 탈레반 집권 시기에 직업을 잃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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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불에서 북서쪽으로 29km 떨어진 이스탈리프(Istalif)의 시장에 들른 둘째 딸 얀 포들리치. 그녀가 짧은 민소매 원피스를 입고 있는 반면 지나가는 여성은 부르카(Burqa)를 뒤집어쓰고 있는 모습이 대조적이다.


얀은 아프간의 첫인상에 대해 “우리는 6월의 햇살 좋은 아침에 카불에 도착했는데, 길가를 휘젓고 다니는 알록달록한 유령들의 모습을 보고 너무 놀라워했었죠.”라고 회상했다. 그녀가 말한 ‘유령’이란 바로 부르카를 착용한 여성들을 묘사한 것이다.

 

애리조나 주립대 교수였던 윌리엄 포들리치(William Podlich) 박사는 1967년 유네스코와 협업으로 카불 고등사범대학에서 강의하기 위해 아내 마가렛과 10대였던 두 딸 등 모든 가족이 애리조나에서 아프가니스탄 카불로 이사해 2년간 지냈다. 17
▲ 하교하는 여학생들. 모든 아프가니스탄의 남녀 청소년들은 고등학교까지 교육을 받았으며, 비록 교복을 입었지만 부르카나 차도르를 의무적으로 착용하지 않아도 되던 시절이었다. 대도시로 갈수록 부르카를 착용하는 비율은 낮아졌다.

 

애리조나 주립대 교수였던 윌리엄 포들리치(William Podlich) 박사는 1967년 유네스코와 협업으로 카불 고등사범대학에서 강의하기 위해 아내 마가렛과 10대였던 두 딸 등 모든 가족이 애리조나에서 아프가니스탄 카불로 이사해 2년간 지냈다. 19
▲ 케밥을 요리하는 상인들. 페그는 “화로에서 갓 나온 양고기 케밥의 냄새와 맛은 말이 필요 없을 정도로 최고였다.”고 회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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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노점상이 아프가니스탄 간식인 잘레비(Jalebi)를 튀기고 있다. 남아시아부터 동부 아프리카까지 즐기는 간식으로 주원료는 밀가루와 설탕이다.

 

애리조나 주립대 교수였던 윌리엄 포들리치(William Podlich) 박사는 1967년 유네스코와 협업으로 카불 고등사범대학에서 강의하기 위해 아내 마가렛과 10대였던 두 딸 등 모든 가족이 애리조나에서 아프가니스탄 카불로 이사해 2년간 지냈다. 23
▲ 아프가니스탄 남자들이 나무 그늘에 앉아 수백 년간 도자기 제작지의 중심지였던 이스탈리프 마을을 바라보고 있다. 이곳은 1990년대 후반 북부동맹과 탈레반 간의 전쟁으로 완전히 파괴되었다.

 

애리조나 주립대 교수였던 윌리엄 포들리치(William Podlich) 박사는 1967년 유네스코와 협업으로 카불 고등사범대학에서 강의하기 위해 아내 마가렛과 10대였던 두 딸 등 모든 가족이 애리조나에서 아프가니스탄 카불로 이사해 2년간 지냈다. 25
▲ 한 시골학교의 화학 수업. 흙벽으로 만들어진 교실과 나무판자로 만들어진 칠판이 매우 열악하지만, 탈레반 전사가 되는 훈련보다는 훨씬 가치 있는 수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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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불이 있는 바미얀 계곡의 모습. 석불은 2001년 3월, 세계인들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탈레반에 의해 파괴(관련 글)되었다. 페그는 여행은 무척 힘들었지만 바미얀 계곡은 엄청나게 넓고 푸르렀으며, 불교에 대해 문외한이었음에도 절벽에 새겨진 불상은 엄청난 유물임을 한눈에 알 수 있을 정도로 장관이었다고 한다.

 

애리조나 주립대 교수였던 윌리엄 포들리치(William Podlich) 박사는 1967년 유네스코와 협업으로 카불 고등사범대학에서 강의하기 위해 아내 마가렛과 10대였던 두 딸 등 모든 가족이 애리조나에서 아프가니스탄 카불로 이사해 2년간 지냈다. 29
▲ 카불의 왕궁. 당시 국왕이었던 무함마드 자히르 샤는 1933년부터 1973년까지 평화롭게 통치했다. 이탈리아 순방 중 무함마드 다우드의 쿠데타로 퇴위했다. 쿠데타 후에는 대통령 궁으로 사용되고 있다.

 

애리조나 주립대 교수였던 윌리엄 포들리치(William Podlich) 박사는 1967년 유네스코와 협업으로 카불 고등사범대학에서 강의하기 위해 아내 마가렛과 10대였던 두 딸 등 모든 가족이 애리조나에서 아프가니스탄 카불로 이사해 2년간 지냈다. 31
▲ 카불에 있는 샤-두 샴시라 모스크(Shah-Do Shamshira Mosque). 오랜 내전에도 불구하고 현재도 남아있지만, 2015년에 이 모스크 근처에서 ‘파르훈다 말릭자다‘라는 27세의 여성을 군중들이 집단 구타해 살해한 사건으로 더 유명하다.

 

※ 파르훈다 말릭자다 살해사건 요약

 

2015년 3월 19일, 파르훈다 말릭자다라(Farkhunda Malikzada)는 여성이 쿠란(Quran)을 불태웠다는 누명을 쓰고 군중들에게 공격을 당했다. 당시 이슬람 원리주의 폭도들은 쿠란을 모독한 그녀를 막대기와 돌로 무자비하게 폭행했으며 도로로 끌고 가 차에 치이게 하기도 했다. 이들은 파르훈다의 시신을 불태우려고 했으나 피로 인해 불이 붙지 않자 옷을 찢어버리고 불을 지르는 극악한 모습까지 보였다. 출동한 경찰들은 이 과정에서 그녀의 죽음을 막지 못했다.

 

사건 후 몇몇 유명인들이 페이스북을 통해 살인행위를 지지하고 종교지도자들은 “쿠란을 지킨 사람들을 체포해서는 안된다.”라고 말하는 충격적인 모습까지 있었으나 그녀가 쿠란을 불태우지 않았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아프간 대중들은 충격과 분노에 휩싸였다.

 

말 그대로 중세시대에나 볼법한 마녀사냥이 일어난 것에 항의하기 위해 파르훈다의 피 묻은 얼굴을 가면으로 착용한 수많은 시민들이 거리로 나왔으며 그녀가 폭행당하는 모습을 재연하며 분노를 드러냈다.(온라인에서 볼 수 있는 고화질의 사진들은 시위대들이 연기하는 모습이다) 이후 경찰 조사에서도 파르훈다는 쿠란을 태운적이 없다는 것이 밝혀졌고, 총 49명이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다.

 

당시 이 충격적인 사건은 아프가니스탄 여성인권의 후진성에 대해 큰 관심을 불러일으키며 재판 결과에 관심이 집중되었다. 처음에는 주범 4명이 사형을 받았으나 파르훈다가 쿠란을 태웠다는 거짓말을 한 자, 파르훈다를 차로 친 자가 사형에서 20년형으로 판결이 뒤집히며 또다시 거리시위가 벌어지고 여성인권 논쟁이 불거지기도 하였다.


애리조나 주립대 교수였던 윌리엄 포들리치(William Podlich) 박사는 1967년 유네스코와 협업으로 카불 고등사범대학에서 강의하기 위해 아내 마가렛과 10대였던 두 딸 등 모든 가족이 애리조나에서 아프가니스탄 카불로 이사해 2년간 지냈다. 33

▲ 카불 근교의 언덕을 산책하는 윌리엄 포들리치 박사. 귀국 후 1981년 교직에서 은퇴했으며 2008년 92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이 사진들을 디지털화해 덴버 포스트에 보내온 것은 딸 페그의 남편. 그의 말에 따르면 수많은 아프간인들이 수십 년 전 자신들의 나라가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보여주는 증거를 복원하고 기억해 준 것에 대해 감사의 인사를 해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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