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짝이 신발로 올림픽 금메달을 딴 선수, 짐 소프(Jim Thorpe)

• 1950년 AP통신 선정 ’20세기 전반기의 가장 위대한 선수’
• 1967년 명예의 전당 멤버들이 뽑은 ‘NFL 50주년 팀 멤버’
• 1999년 AP통신 선정 ’20세기 가장 위대한 선수 3위'(1위 베이브 루스, 2위 마이클 조던)
• 2000년 ABC스포츠 팬투표 ’20세기 가장 위대한 선수 15인’
• 2007년 ESPN 선정’20세기 최고의 미국 선수 7인’

 

위에 열거한 수식어의 주인공 짐 소프(Jim Thorpe)는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운동선수’라는 항목의 설문조사라면 이름이 빠지지 않는다.

 

특히 ‘다재다능함’에 있어서는 역사상 어떤 선수도 그의 발끝에조차 미치지 못할 정도로 압도적인 선수로 ‘사라진 올림픽 종목‘ 글의 미식축구 부문에서도 소개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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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짐 소프(Jim Thorpe, 1887~1953)

 

어린 시절


1887년 오클라호마 주 프라하에서 인디언 혼혈부모 밑에서 태어난 짐 소프는 16세에 양친을 잃고 고아가 되는 어려운 환경에 처했다. 이후 미국 원주민들을 위한 기숙학교인 칼리슬 인디언 실업학교(Carlisle Indian Industrial School)에 다니던 그는 1907년 운동부 학생들이 높이뛰기를 연습하는 것을 보고 작업복을 입은 상태로 지나가다가 재미 삼아 한번 참여했다.

 

다음날 학교의 육상부 코치가 소프를 불렀고, “제가 뭔가 잘못을 저질렀나요”라고 묻는 그에게 코치가 답했다.

 

“네가 높이뛰기 학교기록을 깨버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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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리슬 시절의 짐 소프 (1909년)


알려져 있듯이 20세기 초는 인종적 편견이 지금보다 훨씬 심하던 시절. 그런데 소프는 이미 고등학교 때 미식축구 올 아메리칸 팀이었고 농구, 테니스, 볼링, 수영, 하키, 권투, 체조에서 모두 두각을 드러내며 편견의 벽을 재능으로 뛰어넘었다.

 

당시 6세부터 대학까지의 원주민들이 다니던 칼리슬의 학생은 1,000명 이하에 불과했다. 하지만 1900년대 후반에서 1910년 초반까지 스포츠에서만큼은 아이비리그와 동등한 실력을 자랑한 곳이었는데 이는 순전히 만능선수였던 짐 소프 덕분이었다.

 

짝짝이 신발로 금메달


1912년 스웨덴 스톡홀름 올림픽에서 짐 소프는 5종 경기에 참가해 경쟁자들을 압도했고, 특히 마지막 1500m 경기에서는 4분 44초 8의 기록으로 2위인 제임스 메나울(4분 49초 6)을 5초 이상 차이로 따돌리는 실력을 보이며 금메달을 획득했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 10종 경기가 폭우 속에서 3일간 열렸다. 첫날 100m에서 3위를 차지한 소프는 심기일전하고 둘째 날 경기를 치르려고 하던 중 돌연 가방에 있던 신발이 사라지는 위기가 찾아온다.

 

경기를 목전에 둔 그는 동료들 중 여분의 신발을 갖고 있는지 묻고 다닌 끝에 한 짝은 겨우 구할 수 있었다. 그런데 사이즈가 너무 작아서 발을 억지로 밀어 넣어야 했다.

 

이제 나머지 한 짝이 관건이었다. 소프는 코치와 트랙경기장을 여기저기 헤매고 다닌 끝에 누군가 버린 신발 한 짝을 기적처럼 주웠다. 그런데 이번엔 사이즈가 너무 커서 두 켤레의 양말을 겹쳐 신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이런 상황에서도 110m 허들 1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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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2년 올림픽의 짐 소프와 짝짝이 신발


대망의 마지막 날, 짐 소프의 신발은 여전히 짝짝이였다.

 

비록 장대높이뛰기(3위)와 창던지기(4위)에서 부진했지만 그는 1500m에서 1위를 차지하고 만다. 심지어 멀쩡한 신발을 신고 뛰던 5종 경기 때보다 빠른 4분 40초 1을 기록했다.

 

당시 신발이 사라진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모두 밝힐 수 없는 추정일 뿐이다. 결과적으로 짐 소프가 핸디캡을 안고도 우승했으니 만약 누군가 훔쳐간 거라면 도둑은 경악했을 것이고, 훔쳐간 자가 같은 대회의 경쟁자였다면 운동경기뿐 아니라 삶의 패배자로 전락했을 것이다.

 

이 짝짝이 전설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 동기부여의 일화로 제시되고 있다.

 

공평하지 않은 상황, 누군가의 방해, 건강악화, 인간관계 실패 등으로 좌절했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런 것들 때문에 경기에 참여하는 것을 포기할 수는 없다. 어떻게든 도전한다면 결과가 짐 소프처럼 훌륭하지 않더라도 큰 경험을 얻을 테고 또한 그 자체로 승리자라는 것이다.

 

금메달 박탈


1912년 올림픽이 끝나고 6개월이 흐른 후, 칼리슬 미식축구팀의 시범경기 도중에 소프의 전 코치가 우연히 한 말이 현지 기자들에게 특종을 안겼다.

 

“짐 소프가 올림픽에 출전하기 전인 1909년과 1910년 여름에 경기당 2달러(2021년 기준 60달러)의 돈을 받고 야구경기에 출전한 일이 있다.”

 

당시 ‘아마추어리즘’을 강조하는 올림픽 규정에 따라 대회를 통해 상금을 받거나, 코치로 일했거나, 프로경기에 참여한 선수들은 아마추어 선수로 간주되지 않아 올림픽에 나올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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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프는 해당 논란에 대해 “주변의 많은 대학 선수들이 가명으로 마이너리그 경기에 참가했기에 큰 문제가 될 줄 몰랐다.”며 잘못을 시인했지만, AAU(아마추어 체육연합)는 받아들이지 않았고 결국 IOC는 그의 메달을 박탈했다.

 

많은 사람들이 당시에도 이 결정에 분노했지만 짐 소프의 명예를 회복시키자는 캠페인은 그의 사후에 더욱 격렬해졌다.

 

공교롭게도 1952년부터 1972년까지 IOC 위원장은 소프와 같은 미국인이었던 에이버리 브런디지(Avery Brundage, 1887~1975)였다. 브런디지는 1912년 올림픽에서 소프의 엄청난 능력치를 눈앞에서 목격한 팀 동료였음에도 그를 심각하게 비도덕적인 인물로 몰아갔다.

 

짐 소프의 메달이 박탈되고 아마추어 영역에서 쫓겨나자 에이버리 브런디지는 1914·1916·1918년 미국 최고의 만능경기 챔피언의 자리를 차지했고, 이 챔피언 타이틀은 훗날 그도 인정했듯이 직업인 건설업에서 큰 성공을 거두는데 후광이 되어주었다.


그는 IOC 위원장으로서 충분히 이 문제를 합리적으로 논의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탄원서를 모조리 기각했다.

 

이처럼 스포츠 상업주의에 격렬한 증오심을 보이는 모습 때문에 브런디지는 ‘아마추어리즘의 수호자’라는 평가도 받았지만, 실상은 소프의 명예가 회복된다면 자신의 올림픽 순위도 한 단계 내려가고 위와 같은 인생의 모든 업적들이 빛이 바래기 때문이 아니냐는 의심도 받았다.

 

심지어 ‘소프의 신발을 훔친 장본인이 브런디지가 아니냐’는 의혹과 스톡홀름에서 그가 소프에게 맞은 것에 대한 원한을 품었다는 고발이 이어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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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이버리 브런디지의 선수시절(1912)과 한국을 방문한 모습(1955.05.05.)


결국 1972년 그가 IOC 위원에서 물러나고 미국올림픽위원회가 선수를 위한 기업들의 후원을 허용하고, 1982년 7월에는 미국 의회도서관에서 1912년 스웨덴 올림픽의 규정이 적힌 사본이 발견되면서 소프의 명예회복은 극적인 전환점을 맞게 된다.

 

거기에는 ‘선수에 자격에 대한 이의제기는 20 크로나의 보증금과 함께 폐막 30일이 경과하기 전에 스웨덴 올림픽위원회에 접수되어야 한다’라고 적혀있었다.

 

즉 6개월이 지난 시점에서 이미 소프의 메달 박탈은 부당할 뿐만 아니라 불법이었다. 결국 이 한 줄의 증거로 1982년 10월 13일 IOC는 손을 들었다.

 

이 과정에서 원래 메달을 구할 수 없자 IOC 측은 기념 메달을 제안했지만 열렬한 소프의 지지자들은 스웨덴 측에 연락해 당시의 메달 틀을 찾아내 기어이 똑같은 메달을 만들어냈다. IOC 위원장 후안 사마란치(Juan Samaranch)는 LA올림픽을 앞둔 1983년에 소프의 유족들을 만나 메달 전달식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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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달 전달식과 현재 모습

 

하지만 이는 완전한 명예회복이 아니라 이의제기 가능 기간을 넘겼다는 것에 대한 인정으로 과거 IOC의 실수를 덮고자 하는 행동일 뿐이었다. 여전히 짐 소프는 1912년 올림픽 10종 경기와 5종 경기의 ‘공동’금메달리스트로 올라가 있으며 이제 유족과 짐 소프 협회 등은 그를 당당하게 단독’금메달리스트로 복구해줄 것을 청원하고 있다.

 

운동선수 이후의 삶


짐 소프는 올림픽 근대5종과 10종 총 15개의 종목 중 8개 부문에서 1위를 차지했으며, 10종 우승 점수인 8,412.95점은 2위보다 688점이나 높았다. 이후 4회의 올림픽이 더 열릴동안 누구도 소프의 점수를 능가하지 못했다.

 

1912년의 짐 소프는 올림픽을 제외해도 엄청난 만능선수였다. 그는 칼리슬 미식축구팀으로 돌아와 1,869야드를 달렸는데 이는 엘리트 러닝백의 기준으로 평가되는 ‘2000야드 클럽(2000 yard club)’에 약간 모자라는 수치였다. 하지만 그가 1912년에 뛴 2경기의 세부 기록이 없어서 포함되지 않았기에 짐 소프가 ‘대학 미식축구 사상 최초의 2000야드 러셔’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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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짐 소프 기념우표(1984.05.24. USPS)


비록 프로라서 메달을 박탈당했지만 그는 올림픽에서 무시무시한 능력을 보여준 승리자였다.

 

IOC 덕분에(?) 법적으로 프로선수로 인정됨에 따라 여러 프로팀들의 입단 제안이 잇따르며 소프에게 일이 나쁘게 흘러가지만은 않았다. 1913년에는 MLB 뉴욕 자이언츠와 계약을 하였고, 1915년에는 미식축구 캔턴 불독스에 입단하는 등 인기 스포츠를 동시에 섭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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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짐 소프 전기영화, All-American(1951). 주연: 버트 랭커스터(Burt Lancaster)


하지만 은퇴 후 그의 삶은 대공황과 맞물리고 재산이 바닥나면서 가족들을 위해 잡다한 일을 해야 했다.

 

한때는 미국프로축구연맹(APFA)의 초대회장도 역임했지만 생계를 위해 B급 영화에서 인디언 추장 연기를 하거나 경비원과 건설노동자 등의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운동선수로 엄청난 재능이 빛을 발할 때야 지식이나 인종적 편견이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겠지만 보통사람이 되어서 바라보는 벽은 달랐을 것이다.

 

말년에 알코올 중독자로 전락한 그는 1951년에는 구순암에 걸리는 등 병마와 싸우다가 1953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64세였다.

 

짐 소프 마을


짐 소프의 사후 미망인으로서의 권리를 가진 세 번째 부인 패트리샤는 기념사업에 나섰다.


하지만 소프의 고향인 오클라호마주 쇼니에 마련될 예정이었던 기념사업회가 재정 10만 달러를 마련하지 못하며 진행이 지연되었고, 국가적 스타인 소프의 이름을 이용해 관광업을 활성화하고 싶어 했던 펜실베니아의 마우치 청크(Mauch Chunk)와 이스트 마우치 청크(East Mauch Chunk)라는 마을이 사업에 끼어들었다.

 

결국 패트리샤는 이들과 거래를 했고, 두 마을은 합병하며 아예 마을 이름을 ‘짐 소프’로 개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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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짐 소프 마을 모습과 위치


문제는 이곳이 짐 소프가 생전에 하루라도 살기는커녕 한 번도 방문하지 않았던 곳이었다는 점이다.

 

2010년 짐 소프의 아들은 아버지의 묘를 고향인 오클라호마로 이장해달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당시 연방지방법원은 아들의 손을 들어주었으나 2014년 미국 순회 상소법원이 이 판결을 뒤집었다. 최종적으로 미국 연방대법원은 2015년 이 소송을 심리하지 않으면서 사실상 기각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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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역 풍경


현재 짐 소프 마을의 기념비 터에는 원반 던지기와 미식축구를 하는 짐 소프의 동상과 묘비가 세워져 있고, 묘비에는 1912년 올림픽 우승 당시 스웨덴의 왕 구스타프 5세가 짐 소프를 치하했던 말이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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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세계 최고의 운동선수입니다.(sir, You are the greatest athlete in the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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